박성수의 그림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이 분명한 행위를 나타내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어떤 서사를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쉽게 가시지를 않는다. 그건 아마도, 그림 속 형상들의 구체성 때문에 일어난 일 같은데, 그 명확한 형상들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가 그림 너머의 알 수 없는 이야기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짐작에 선명한 화면을 무색케 할 만큼의 모호함도 크다. 그 모호함이라는 것이, 어쩌면 과도할 정도로 선명한 색과 형태에 빠르게 몰입했다 빠져나오는 우리의 습관적인 감각을 이 그림 앞에서 좀 더 지연시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생각은, 내가 그의 최근 작업을 출발점으로 삼아 시간을 거꾸로 하여 그 이전의 작업을 되짚는 경로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어디까지나 사후적인 개입이며 또한 현재에 대한 의미를 특히나 강화시키는 태도임을 미리 말해둔다. 그리고 어느 만큼은, 이 “시제”에 대한 감각을 그도 작업 하나하나에서 이미 색과 형태에 대한 조형의 논리로 풀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거의 확신하며 이 글쓰기를 감행해 본다.
출발은 <바래지 않을 바람들>(2020)부터다. 풍성하게 뒤엉킨 분홍 공단(satin) 천이 배경을 이루고, 그 사이를 뚫고 나온 듯한 손들이 양손 혹은 한 손의 동작을 파편적으로 나타낸다. 그림 전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형상으로서의 이 여남은 손들과 바탕의 색을 떠맡은 천을 매개하는 또 다른 이미지로 꽃과 나비와 실과 바늘이 있다. 크게 숙고하지 않아도 여러 정황을 대략 모아 짐작해 볼 때, 그림의 바탕을 이루는 게 공들여 만든 크고 화려한 이불천이 맞다면 현실을 초월한 현재의 바람이 잔뜩 깃든 누군가의 혼수 이불이었음이 틀림 없다. 현실을 초월한 현재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과거로부터 미래의 시간들이 뒤엉켜 만든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현재의 발현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는 초현실적인 시간들이 빚어낸 현재의 바람을 말하며,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이불천은 그러한 중층의 시공간을 함의한다. 이를테면, 분홍 공단에 정성껏 수놓은 모란과 나비는 과거로부터 유전되어 온 미래의 삶을 매개하며, 이불천에 대해 시각 보다 앞선 촉각적 지각은 밤이라는 깊은 수면의 시간과 그 밤(꿈)의 상상적인 것들이 견인하게 될 아직 오지 않은 현재의 삶에 대한 필연적인 결핍을 새삼 동시에 환기시킨다. 밤의 세계라는 것이 그렇다. 모란과 나비로 투사된 삶의 지극한 소망 아래 몸을 뉘이면, 꿈과 현실 혹은 과거와 미래 혹은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역설적 함의를 표상하는 마술적인 시공간이 열린다. 적어도 <바래지 않을 바람들>에서, 나는 저 그림의 바탕을 이루는 화려한 이불천이 그러한 마술적 시공간의 분리해 내기 어려운 중첩을 그려내는 것으로 보았다.
박성수는 이 그림에 대해서, “할머니를 이어 엄마로 그리고 나에게 오는 바람이 있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그 바람들은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무던히 바래지 않고 흘러 스민다”고 덧붙였다. “채워지지 않았던 별안간의 일들로 인해 오히려 스민 바람들에서 빠져나와 나의 바람이 생겼다”고 말하는 그는, “이불 깊숙이 감춰 눈을 감아야 그려 낼 수 있는 꿈”을 언급하면서 <바래지 않는 바람들>에 대한 작가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맞다. 그는 이 그림의 바탕을 그려내는 이불천으로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마술 같은 시공간에 대한 표상을 나타냈다. 그것은 마치 할머니가 딸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분홍색 이불천을 방 안 가득 펼쳐놓고 한 땀 한 땀 수놓았던 나비와 모란이, 오래된 그 먼 과거의 제 자리로부터 희미한 서사를 딛고 옮겨 와 박성수의 그림 표면에 일련의 선명한 형상으로 되살아나기까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계속해서 서로의 시제를 재편하면서 이 시공간의 교차가 환기시키는 보편적 삶의 개별적인 서사에 유독 주목을 끈다. 더 나아가 할머니에서 시작돼 어머니를 거쳐 박성수 자신에게 까지 이어진 “바람”의 실체는, 사뭇 바느질에서 붓질로 이어진 “미적 노동”의 신화적 근원과 그 역사를 재편하려는 (타자의) 충동마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박성수의 그림이 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형상들은 어머니의 장롱에 박제되어 있던 혼수 이불을 토대로 그것이 함의하는 마술적 시공간의 맥락과 상징적인 서사를 그림으로 옮겨와 회화적 관습 안에서 새롭게 복구되는 과정을 살핀다.
이처럼 <바래지 않을 바람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박성수의 그림에서 배경에 나타난 시공간의 특징과 그 마술적 시공간이 함의하는 중층의 서사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그 서사를 보편적인 정서와 개별적인 경험 사이를 오가며 새로이 구축함으로써 그림의 맥락을 그 애매한 시공간의 간극에 걸쳐 두려는 것 같다. 그리하여, 아주 익숙한 구체적인 형상들이 불러일으키는 보편적 감각과 동시에 그 배후(배경)에 마련돼 있는 개별적인 시공간의 비밀스러운 서사를 내내 가늠케 한다. <바래지 않을 바람들>에서는, 풍성하게 겹쳐진 이불천(배경) 사이를 뚫고 나온 구체적인 손들과 그 행위가 이불을 만드는 이 보편적인 노동에 특수하고 개별적인 서사를 얹어 놓는다. 임의의 손들은 모두 한 사람의 것으로, 도구를 잡은 오른손의 특징적인 형태와 약지에 낀 반지 탓에 의심할 여지는 더욱 없다. 그리고 그동안 그가 그려온 여타의 그림들로 추정해 볼 때, 그 한 사람은 박성수 자신인 게 또한 분명하다. 요컨대, 박성수는 (모든 오해와 판단을 무릅쓰고) 노골적일만큼 명료한 색과 형태로 가득 채워진 “표피적인” 그림을 자처하여 그리면서도 갑작스럽게 그 배경을 뚫고 나오는 희미하고 빛 바랜 서사적 시공간에 대해 환기시킴으로써, 때때로 배경과 형상 간의 명료한 구분을 일순간에 꿈처럼 마술적인 상황 속으로 옮겨다 놓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형상과 배경의 위계를 전복시킬 만하다.
이러한 태도는 박성수의 그림에서 일관되게 엿볼 수 있는 특징으로, 나는 이를 두고 배경과 형상 간의 시차(時差)가 유도하는 초현실적 서사의 (우연한) 발견이라 말하고 싶다. 손의 형상을 매개로 한 최근의 그림에 앞서, 그가 한동안 지속해 온 “빙고와 모모” 연작도 같은 논의의 선상에서 겹치는 면이 있다. 이는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바래지 않는 바람들>과 같은 그림의 화면 구성이 부쩍 부각되면서 여타의 다른 그림에서 그것의 징후를 살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후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어느 때에, 자연스러운 작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림 안에 등장했던 임의의 개와 고양이가 어떤 변곡점에 이르러 “빙고”와 “모모”라는 의인화된 캐릭터로 특정되었는데, 이는 그의 그림이 현실에서 어떤 마술적 혹은 초현실적 시공간으로 확장되는 변화를 알린 계기가 됐다. 초기의 회화적인 조형 감각을 지워내고 그 자리에 만화 캐릭터 내지는 동화 일러스트처럼 표피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 박성수의 그림은, 빙고와 모모가 매개하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초현실적 시공간을 중첩시켜 놓았다. <집으로 가는 길>과 <빛나는 별>의 경우, 선적인 그림이 과시하는 명확한 형상에 비해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공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대조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박성수는 그림의 표면에 미끄러지듯 지속적으로 맴도는 심리적인 정서에 주목하려 애쓴 듯하다. 그런 이유로, <바래지 않는 바람들>로부터 시작된 <집으로 가는 길>과 <빛나는 별>로 이어지는 그의 지난 작업의 과정을 역순으로 살피면 그는 그림의 배경과 형상 간의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낙차를 초월하여 초현실적 회귀와 마찬가지로 마술적인 시공간의 중첩을 과감하게 시각화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유별난 것은 결코 아닌데, 그는 현실의 어떤 순간에 다시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들이 느닷없이 자신의 몸에 어떤 징후처럼 나타나는 현재의 마술적인 상황을 꽤 신중하게 살펴왔다. <집으로 가는 길>과 <빛나는 별>에서, 그가 과거에 겪은 일련의 사건은 실체 모를 감정들로 변이 되어 어떤 시공간에 뒤섞여 봉인되었을 테고 현재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그 숱한 낙차에도 불구하고 되풀이 되듯 같은 서사로 중첩되는 초현실적 상황에 의해 다시 조명 되어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장면으로 뭉뚱그려진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그림의 배경에 있어서 익숙한 특정 공간이나 사물의 형태를 구체화 하고 있으나 마치 사진으로 남겨진 어떤 미지의 시공간처럼 그 맥락을 도통 헤아릴 수 없는 빛 바랜 누군가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여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자아냈다. 그런 의미에서 <바래지 않을 바람들>은 선명한 색과 형태로 과시된 그림의 표면 너머 희미한 서사의 갱신을 도모한다. 즉, 빛 바랜 과거의 서사가 잔해처럼 남긴 색과 형태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박성수는 그것을 그림에 옮겨 선명한 색과 형태를 구축할 “붓질”로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치 표면에 맞닿은 화면의 역설적인 깊이를 의식한 듯, 유화 물감을 얇게 켜켜이 바르면서 희미함에서 선명함으로 혹은 과거에서 현재로 기억의 이미지에서 그림의 형상으로 차츰 전이되어 갔다. 또한 그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다른 시공간에 중첩시켜 놓아 현재와 맞닿아 있는 과거의 정서를 기억해낸다. 복잡하게 뒤엉킨 서사를 붙들고 그것을 완성시키는 화자가 되는 대신, 그는 오히려 그 서사가 남긴 잔해들을 선명하게 복원시킬 회화의 방법에 대해 고심하는 듯하다.
<기억의 덩어리>(2020)는 <바래지 않을 바람들>에서 보인 화면 구성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다. 분홍 천이 차지하던 배경 대신 보라색 수국과 이파리가 그림의 표면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다. 이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이 기억되어 기억이 된다”는 말장난 같은 속내를 덧붙인 박성수는, “연하고 연한 기억들은 과장으로 환하게 피어 송이송이 큰 꽃이 된다”며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단상을 밝혔다. “내 기억은 물처럼 흐르고 베어지고 다시 그려져 아름다운 것만 골라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그는, 나비와 모란이 가득 수놓아 할머니가 지어주신 어머니의 이불처럼 어떤 소망을 가득 담아 현실을 초과한 세계, 즉 과거의 기억에서 유전된 미래의 바람을 구축한 마술적 세계를 선명한 그림으로 완성해내리라는 그림의 당위를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이는 그림 그리는 이가 스스로 그림에 대한 명분과 의미를 진솔하게 밝히는 태도로 비춰지는데, 그는 희미하고 어둡고 연약한 것을 기억 혹은 과거의 시제와 연동시켜 놓고 그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현재의 회화적 갱신을 시도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회화적 표현의 가능성을 살피며 그 과정에서 그림 그리는 이의 “손”의 위상을 어렴풋이 환기시키기도 한다. <기억의 덩어리>에서 꽃과 이파리 사이를 뚫고 나온 손들의 움직임을 보면, 내심 그런 솔직한 생각에 머물게 된다.
이번 전시는, 기존의 “빙고와 모모” 연작에서 이어진 그림들과 “손”을 매개로 새로운 조형적 화면 구성을 제시한 최근 작업이 함께 보여진다. 사뭇 대조적인 면들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그가 형상과 배경 혹은 표면과 표면 너머의 시차와 서사적 낙차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는 점에서는 둘이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0여 점의 드로잉이 함께 전시돼 둘 사이의 연결점을 자연스럽게 잇는다. 일련의 <못 생긴 드로잉>(2016-2019) 연작은, 그림에서의 배경 없이 구체적인 형상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작가의 생각과 그 흐름을 드러내준다. 마치 어떤 사물과 풍경과 장소가 현실을 뛰어 넘어 다른 시공간 및 다른 서사와 중첩되려 하는 초현실적 순간에 강렬한 변이를 보여준다. 이렇듯, 박성수의 그림은 현재에 맞닿아 있는 다른 시공간으로의 확장을 꾀하기도 하고, 특히 과거의 희미한 기억들을 회화의 색과 형태로 선명하게 되살리는 마술적인 시도를 꾀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만화나 동화의 삽화처럼 명료한 형상을 과시하면서 완벽하게 채워진 표면을 강하게 표출하지만, 반면 이 형상들의 기원이 갖고 있는 복합적인 서사와 표면 너머의 불확실한 시공간에 대해서 짐작케 하는 우회의 경로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황홀한 고백⟫인데, 이 제목을 쓴 작가의 속내를 가늠해 보면 초현실적 상상과 그것의 출현을 도모한 이 그림들이 매우 개인적인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선명한 색과 형태에 감춰진 켜켜의 얇은 물감 층처럼 자신의 깊은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썼던 대로, “어쩌면 과도할 정도로 선명한 색과 형태에 빠르게 몰입했다 빠져나오는 우리의 습관적인 감각을 이 그림 앞에서 좀 더 지연시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